
‘조커(Joker, 2019)’는 단순한 슈퍼빌런의 탄생기를 넘어,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소외와 분노,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코믹스의 세계관을 해체하고, 현실 사회의 불평등과 정신적 고립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했다.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악인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밀려난 인간의 초상이다. 그는 웃음을 잃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웃는 괴물’이 되어야 했다. 본 리뷰에서는 ‘조커’가 제시하는 사회적 맥락, 인간성의 붕괴, 그리고 예술로서의 파괴적 미학을 분석한다.
광기 이전의 인간, 아서 플렉의 초상
‘조커’는 악의 탄생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처음부터 아서 플렉은 악인이 아니다. 그는 병든 어머니를 돌보며 생계를 위해 광대 일을 하는 평범한 남자다. 그러나 사회는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복지 제도가 무너진 도시는 그의 약을 끊게 만들고, 거리의 폭력은 그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몰아간다. 아서는 웃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은 그를 ‘웃음거리’로만 소비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아서의 내면을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를 통해 천천히 해부한다. 그의 표정, 몸짓, 눈빛 하나하나가 고통의 기록처럼 다가온다. 특히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 자체로 인간의 붕괴 과정을 시각화한 예술이다. 그는 마른 몸을 뒤틀며 춤을 추고,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린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사회적 고립이 낳은 일종의 신체적 진실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반복되는 계단 장면은 상징적이다. 처음에는 무겁게 올라가던 계단을, 조커가 된 이후에는 환희에 차서 내려온다. 위로 오르던 인간은 사회의 벽에 막혀 내려오고, 그 내려옴이 광기의 자유로 전환된다. 이 역설적 전환이 바로 ‘조커’가 인간의 본질을 묻는 첫 번째 질문이다. ‘광기’는 과연 병인가, 아니면 사회의 부정의가 만든 또 하나의 이성인가? 아서의 미소 속에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억눌린 인간이 세상에 내미는 마지막 저항의 형태다.
폭력의 미학과 사회의 해부학 — 조커가 비추는 현실의 거울
‘조커’의 본론은 단순한 캐릭터 분석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폭로다. 토드 필립스는 영화의 배경을 ‘고담시’라는 가상의 공간에 설정했지만, 그 도시는 1980년대 뉴욕의 실체적 초상을 닮았다. 빈부격차, 공공서비스의 붕괴, 부패한 정치, 그리고 미디어의 냉소가 뒤섞인 공간에서 인간은 점점 비인간화된다. 아서가 지하철에서 세 남자를 살해하는 장면은 그 전환점이다. 그 폭력은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끝없는 모멸 속에서 폭발한 본능적 자기방어였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행위를 ‘혁명’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은 그를 ‘조커’라 부르며, 대중은 그를 상징으로 소비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철저히 냉정한 현실 비판으로 진입한다. 사회는 ‘괴물’을 만든 뒤, 그 괴물을 ‘영웅’으로 추앙한다. 대중은 그를 통해 자신의 분노를 대리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겪은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 이 모순된 구조 속에서 조커는 점점 더 현실과 단절된다. 그의 폭력은 세상을 향한 복수라기보다,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려는 절규다. 필립스는 이러한 서사를 색감과 사운드로 강화한다. 회색빛 도시의 차가운 질감, 노란 조명 속 붉은 피, 그리고 낡은 라디오의 소리는 현실의 추악함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음악감독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첼로 선율은 광기의 리듬을 만들어내며, 관객을 아서의 내면 깊숙이 끌어들인다. 결국 ‘조커’는 사회의 실패를 인간의 얼굴로 형상화한 영화다. 그것은 슈퍼히어로 서사의 반대편에서 울려 퍼지는, 가장 현실적인 비극이다.
조커 이후의 세상 —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로 물든 조커는 카메라 앞에 선다. 그는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관객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다. 이때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짜 광기 속에 있는가?” 조커의 광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산물이다. 무관심과 냉소가 구조적으로 내면화된 사회는 결국 새로운 조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조커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토드 필립스는 조커를 통해 인간성과 문명의 경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아서는 끝내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 부정이 곧 그의 자유가 된다. 그가 무대 위에서 춤출 때,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해방이다. ‘조커’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깨달음의 시작이다. 우리는 광기를 두려워하지만, 때로 그것이 가장 솔직한 인간의 얼굴일 수 있다. 결국, ‘조커’는 현대 문명에 대한 철저한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짜 미친 건, 그였을까? 아니면 우리였을까?”
조커는 현대 사회에 많은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